감독의 아내로 즐겁게 살아가기 위한 요령

2017. 4. 1. 22:22

마루님

기타

감독의 아내로 즐겁게 살아가기 위한 요령

/안수현 (너는 내 운명>, <박쥐> 프로듀서, 그리고 최동훈 감독의 아내)


내 남편은 좋은 감독이다. 그러나 내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주변의 감독들은 다 말렸다. 감독과는 연애만 하는 게 좋을 것이라며. 38살 노처녀에게 참 고마운 충고였다. 그렇지. 같이 사는 것보다는 일을 해서 부귀영화를 도모하는 것이 프로듀서인 나에게도 더 유리한 것 아닌가. 그러나 같이 일할 수 있는 감독은 많지만 같이 살자는 감독은 최동훈 밖에 없었으니 일단 감사한 충고를 무시하고 결혼했다.

시나리오 구상 중 생각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고(잠들기 전 소곤소곤 옛날 이야기를 해주거나 책을 읽어주는 보너스도 있다) 직접 연기도 하면서 대사를 읊고(개그 콘서트보다 재미있다) 다음 영화에 사용할 음악이나 의상들을 찾아 다니고(같이 쇼핑가면 절대 지루해 하거나 재촉하지 않는다) 매일 영화 한편씩을 추천해 주는(덕분에 빌리 와일더의 <제17포로수용소>가 전쟁영화가 아니라 재미있는 코미디 영화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람과 같이 사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다. 왜 감독과의 결혼을 말렸을까?

영화를 만들 때는 감독이고 시나리오를 쓸 때는 작가인 최동훈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는 한량이다. 공상하는 한량일 때는 세상이 사랑스럽고 본인이 자랑스럽고 미래는 희망차다. 잠도 잘 잔다. 식사도 맛있게 하고 몸도 건강하다. 그러나 공상이 끝나고 하얀 백지를 마주하고 앉아 한자씩 적어가면서 자기 분열이 시작된다. 본인이 쓰고 있는 이야기가 쓰레기는 아닐까 라는 의심에서 걸작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몸부림치며 얼굴은 시커매져 가고 같이 잠자리에 드는 날은 손에 꼽기 시작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작은 방 구석에서 10년도 더 된 작은 TV 앞에 앉아 영화를 보며 난 왜 저렇게 안 써지지 머리를 쥐어 뜯으며 작아져 있는 남편을 발견한다.

시나리오 초고가 나왔을 때 첫 독자가 되어야 하는 아내의 마음 역시 천국과 지옥을 넘나든다. 과연 이 작품이 우리의 노후를 보장해 줄 것인가 라는 흥행성과 이 작품이 영화제라도 가서 공짜 해외여행의 기회가 생길까 라는 작품성 중 어느 기준으로 시나리오에 대한 의견을 말해야 할까? 막 시나리오를 끝낸 남편이 “너무 재미있어. 걸작을 썼구나!” 라는 열광적인 반응을 원할까? 아니지, 감독의 아내답게 더 날카롭고 진심 어린 비판과 대안을 제시해야지. 시나리오 사이사이 열심히 적어놓은 메모까지 곁눈질로 봐가며 한참을 얘기하는데 남편이 말한다. 당신은 내 작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구나. 그 때 알았다. 혼자 외롭게 그 긴 작업을 포기하지 않고 끝낸 남편에게 필요한 것은 아내의 따듯한 말 한마디 “수고했어. 해냈구나.”인 것을. 완벽한 작품이 어디 있겠는가. 가장 가까운 사람인 내가 그 불완전함만을 꼬집어 이야기 한다면 절반의 완전함을 만들기 위해 그렇게 애써 온 남편의 수고를 누가 알겠는가 말이다.

예술가의 아내로 산다는 것은 재미있지만 어려운 일이다. 아예 악처가 되어 남편이 더 작품에 몰두하도록 하던가 예술적 영감을 줄 수 있는 뮤즈가 되기 위한 미모나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저 평범할 뿐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옆에서 격려하며 그 고통을 불쌍히 여기는 정도이다. 그러나 감독이란 창작의 고통도 촬영 현장의 노동도 다 본인의 작품을 위해 스스로 선택해 즐거워하며 하는 일인데 싶을 때는 솔직히 별로 위해주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아주 외롭게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꿋꿋이 자기 길을 가고 있을 때, 작품이 실패하여 스스로에게 절망할 때 그럴 때 옆에서 기 죽이지 않고 내 남편이 최고라고 말해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진심으로 그러기 위해선 나도 내공이 쌓여야 하겠지만!

그래서 감독의 아내로 살아가는 요령을 정리해 보겠다.

특정 영화를 보라고 강요할 때 못이기는 척 재미있어 하면서 봐주기. 
남편은 감독인 자신의 취향을 이해해 주길 원하니까.

소파에 누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낮에 바둑프로를 보고 있거나 한밤에 축구경기를 보고 있어도 게으르다고 핀잔주지 않기. 
그러는 동안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날 수도 있다.

아무리 화 나는 일이 있어도 밤에 바가지 긁지 않기.
다음날 아침 남편은 시나리오를 써야 하거나 촬영하러 가야 하니까.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 2시에 술자리에 오라는 연락을 받고 나갈 때도 잘 다녀오라고 편안히 보내주기. 
가끔은 거기서 중요한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니까.

시나리오나 영화를 끝낸 후 처음 봤을 때 진심으로 수고했다고 말해주기.
냉정한 비평은 시간이 지난 후에. 아내인 나 말고도 비판해 줄 사람은 주변에 넘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에겐 <박쥐> 촬영이 더 급하다. 
그래서 위의 요령들을 실행해 볼 기회가 없다.
참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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