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마지막 황제 The Last Emperor - 명작은 시대를 초월한다

2013. 12. 18. 13:53

마루님

영화/명작

 일찍이 류이치 사카모토 Rain이란 곡으로 영화 자체는 알고 있었다. 게다가 호평을 받은 명작이란 것도 알고 있었지만 오래된 옛날 영화인데다 딱히 남의 나라 얘기라 선뜻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본의아니게 근성작인 보보경심을 보다가 배경이 청나라 전성기시절의 황제(강희제-옹정제)를 다루는데 문득 그 왕조의 끝이 궁금했다.


영화를 보기도 전에 그냥 텍스트로 푸이의 삶을 읽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왕과 다를 바가 없어 소름이 돋았다. 일본의 마수에 뻗쳐 아무것도 못하고 조종당할 뿐인 허수아비. 게다가 주변인을 초토화시키고 고립시키는 악랄함 그리고 황제의 아내를 겁탈하는 파렴치한 수법까지 닮아있었다. 정말이지 황후를 능멸한 일본의 천박한 계략이란 텍스트로 보는데도 불구하고 소름이 돋았다. 다만 다른게 있다면 우리나라 조선말기 왕은 끝까지 조선독립 아니 대한제국 독립을 염원하고 활동했었는데, 푸이는 만주괴뢰국의 꼭두각시 노릇하며 중국인 학살 등의 일본 만행을 부린데 가담을 했다는 것. 형무소에서 10년 모범수로 살다 말년에 간호사 후처를 두긴 했지만 비참한 최후다.


영화는 중국소재 영화인데 서양을 겨냥해 만든게 역력하게 영어를 쓴다. 너무 이질감이 들어 차라리 중국어 더빙에 자막을 봤으면 싶더라. 조연급은 어설픈 영어발음이 거슬렸지만 황제나 황후나 연기력은 만족스러웠고 등장인물이 한두사람도 아니고 저 많은 사람이 다 영어를 쓰니 어디서 저렇게 영어에 능한 중국인을 저 당시에 모집했을까 싶더라. 수 많은 떼씬에 당시 중국상을 보여주기 위한 컷들, 이 영화에 대한 평이 '중국보다 더 중국같은'이라는데 외국인 감독이 이정도로 밀도있게 남의나라 정서와 역사를 담아내는 데 얼마나 공을 들였을지 알만했다. 같은 시대의 변혁을 담은 왕가위의 [패왕별희]와 오프닝 시퀀스부터 톤이라든가 여백같은 면에서 궤를 하는 부분이  비교하는 맛이 있었다.


다들 주인공 존 론의 연기력만 보였을지 모르겠는데, 존 론이 지나치게 이국적으로 생겨서 아무리봐도 서양혼혈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검색해보니 홍콩출신에 천애고아였다고. 브로드웨이 진출해서 이런 역작에 일국의 황제역할을 소화했으니 인생역전. 나는 황제보다 황후 역할이 더 다가왔다. 10대 중후반에 시집와서 비전도 미래도 없이 몰락하는 가운데 껍데기 뿐인걸 알면서도 그 곁에서 소용돌이를 벗어나지 못했던 여자. 마수가 뻗어오는 걸 감당하면서 아편도 겁탈도 사산 등 황후였으나 파란만장한 여생을 보내며 시간이 지날수록 타락한 모습을 그려낸 조안 첸 연기에 감탄했다. 빨간 쓰개속에 수줍어하던 예뻐서 깜짝 놀랐던 그 예쁜 소녀 황후가 생각나지 않을정도 였으니까.


오프닝 시퀀스에서 어딘지 모르게 패왕별희랑 닮았다 느꼈는데 패왕별희가 7년 후 작품이다. 가치관이 정립되기 전인 꼬꼬마시절,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린다. 처음엔 내가 황제라는 것에 들뜬 어린애가 점점 아무 권위도 권력도 없는, 심지어 자유마저 박탈당한 허울뿐인 왕놀이에 불과했다는 걸 인식하자마자 거대한 자금성에 고립은 처절하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그의 의지가 없었다. 자금성에 입궁한 것도, 황위에 오른 것도, 황후와 후궁을 들이는 것도, 자금성에 출궁한 것도. 다만 그가 통치에 욕심을 내면서 몰락은 끝간데 없이 마지막 황제의 품위마저 타락시킨다. 어깨넘어 사태를 보는 황후도 이용당하는 황제를 걱정하고 일본을 견제하는데 황제는 일본밖에 기댈곳이 없고 자신의 품위를 지켜줄 수 있는 곳이 일본 밖이라 일본이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동아줄과 같았다. 처음에 출궁조치로 인해 네덜란드 영사관이나 다른 영사관에 망명요청을 받아주지 않은 것도 내정간섭은 명분이고 일본 대사관을 찾아오도록 만든 계략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결국 조상의 본거지 만주에 제 발로 일본을 찾아가 만주 괴뢰국에 허수아비 왕 노릇을 또하면서 자신이 가졌었던 황제라는 감투와 지푸라기 같은 권력을 잡으면서 다시 들뜬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만약 아예 후계자 자체를 없앴다면. 서태후가 좀 더 오래살았다면. 푸이 나이가 좀 더 많았더라면. 

푸이가 통치하는 황위에 욕심내지 않고 차라리 자결했다면 명예롭게 다시 역사는 마지막 황제를 평가했을텐데. 만약 조금만 영민하게 사정에 밝고 리더십이 있었다면, 영국처럼 이름뿐인 황제 위치만이라도 건사할만한 능력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마치 푸이는 죽을걸 알면서 뛰어드는 나방처럼 몰락에 몸부림이 거셌고, 몸이 타들어가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 내내 푸이의 교사를 제외하곤 유모, 후궁, 황후까지 작별인사도 없이 그의 곁을 떠났다. 다른 또하나는 그의 의지대로 밖을 나갈 수가 없었다. 그토록 집에 가고 싶고 드넓은 감옥과도 같았던 자금성을 계속 벗어나고 싶어했지만, 막상 자금성 출궁명령을 듣자 소리를 버럭지르면서도 어쩔 줄 몰라한다. 만주국 황제가 되어서도 마찬가지. 자금성 문을 환관들이 막았다면 이젠 일본군이. 애초에 3살배기로 자금성에 들어왔을 때부터 진정한 그의 편이랄 게 없었다. 다 눈치만 볼 뿐 진실을 말하지도 조언이나 충언을 해줄 인물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도 남이 신겨주는 신발에 칫솔에 치약하나 안묻히는 폐위된 황제. 중국의 황족 여자들은 손톱을 길러 일하지 않는 고귀한 신분을 드러냈다고 하는데, 시중드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그사람의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옛영광만이 전부인 사람에게는 무능력의 극치로 참으로 거추장스러운 꼴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수하는 지긋지긋해하며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신신당부하면서 말미엔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일갈, 황제는 자신이 제일 비참한 사람이라 주변을 포용하는 리더쉽은 없는 사람이었다.


역사 누설을 미리 봤기에 일본이 자행한 황후 겁탈 만행을 영화에서 어떻게 그릴지 주목했는데, 명작 클라스 답게 표현이 세련됐다. 아이를 갖고 싶다고 한 황후에 아편에 중독된 그녀를 거절하는 황제. 얼마 안있어 식사자리에 만주인 애를 가졌다고 하는데, 후에 들어온 일본 아마카스에 황후가 수태했다고 하니 애아빠 이름을 적어준다니. 정말 소설의 한장면을 극화한 듯한 품위를 꺾지도 극을 크게 동요시키지도 않으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놀람을 자아내도록 하다니. 명작 클라스가 엿보이는 장면이었다.


얼마 안가 일본이 패전하고 막 도망치려고 하는데 집나갔던 황후가 갑자기 돌아와 황제는 가자고 재촉하는 수하들을 뒤로하고 그녀에게 다가가는데 이미 그녀는 애도 사산하고, 아편으로 인해 제정신도 아니고 사람들에 침이나 뱉는 정신병자였는데, 황제는 그런 그녀에게 뭔가 할말이 있다는 듯이 머뭇머뭇하는 찰나 그녀는 오히려 그를 향해 문을 닫는다. 황제는 아마 자신을 떠난 사람들은 하지 않았던 작별인사를 그녀에게 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후 감옥에서 변기청소나 마당쓸기도 손수 해야하는 일반시민 아니 그 이하 전범의 삶으로 10년간 이겨내는 그를 보면서, 중국사람들에 만행을 저질렀던 첨병이었던 마지막 황제를 겨우 10년만에 석방시키다니, 마음이 넓은건지 마지막으로 황제에 베푼 예우였는지 알 수 없지만 형무소 이후의 삶은 그다지 동정이 가지 않았다. 형무소 소장이 민족반역자로 처단당할 때 좋은사람이라고 외치는 거 보면 늙어서도 세상 물정 모르나 싶고. 홍위병이나 일렬종대로 늘어서서 찬양노래를 하던 소녀들의 미니 마스게임을 보면서 저 소년소녀들이 과연 이데올로기를 이해하고 저러는 것일까 세상을 가진자의 생각대로 사상이 주입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장면은 이제는 공산당 당원복을 입은 아이와 마주하는 장면으로 여운이 남았다.


정말이지 20년이 훌쩍넘어 근 30년전 작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역사적으로 가치있고, 이념적이며, 세계화의 변혁속에서 안경, 변발, 자전거 모두 서양것이 최고라고 강요하는 오리엔탈리즘 시선에 대해서도 생각해 봄직한 작품이었다. 서양문화의 우월한 의식으로 모두 바꿔야 할것이라고 외쳤던 존스턴이 서구열강들의 훈수질의 은유인 것 같아 가장 눈엣가시처럼 꼴뵈기 싫었는데 그는 처음 모자를 하사 받을 때와 다르게 점점 청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청의 복식을 입어보이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에서는 만주사변 만행은 쏙 빼고 상영했다가 제작사의 항의로 다시 원본대로 상영했다는데, 류이치 사카모토가 어찌보면 자국의 치부와 연관된 역할에 출연한건데 용기 있다는 생각과. 젊은 시절 나름 얼굴이 잘생겼다 그생각. 주인공이 굉장히 서구적인 얼굴인데도 불구하고 못지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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